3.1절. 공휴일이라 쉬는데 멀리는 못가겠고, 유적지를 한번 찾아가 볼까 하다가 찾아간 행주산성. 3.1절과는 관련이 없지만 그래도 임진왜란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아이들에게 Youtube 를 통해서 영상교육좀 시키고, 조선왕조실록 역사책을 뒤져서 행주대첩에 대한 공부를 시킨다음 길을 나섰다.
행주산성 [幸州山城 ] - 네이버 지식백과
사적 제56호.1963년 지정. 면적 347,670㎡. 정확한 축성연대와 목적은 알 수 없으며, 임진왜란 때 장군 권율(權慄)이 대첩을 이룬 싸움터이다.
1592년(선조 25) 7월 8일 이치(梨峙)에서 왜적을 격멸한 권율은, 12월 수원 독산성(禿山城)에서 다시 적을 물리친 뒤 서울 수복작전을 개시, 조방장(助防將) 조경(趙儆)과 승장 처영(處英) 등 정병 2,300명을 거느리고 한강을 건너 행주 덕양산(德陽山)에 진을 치고 서울 수복을 노렸다. 이때 왜군 총수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등의 부하 장성을 거느리고 3만여 병력으로 공격해왔다. 권율은 이들을 처절한 접전 끝에 크게 무찔렀다.
지금 산허리에 목책(木柵) 자리가 남아 있고, 삼국시대의 토기 조각이 출토되는 것을 보면 임진왜란 이전에도 중요한 군사기지였음을 알 수 있다. 1603년(선조 36)에 세운 행주대첩비와 1963년에 다시 세운 대첩비가 있으며, 1970년 권율의 사당인 충장사(忠莊祠)를 다시 짓고 정자와 문을 세웠다.
행주대첩 [幸州大捷] - 네이버 지식백과
권율은 임진왜란 초에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있으면서 군사를 일으켜 전공을 세워 전라도 순찰사(巡察使)가 되었는데, 그 뒤 중국 명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서울을 수복하려고 군사를 이끌고 수원성(水原城)에 머물다가, 1593년(선조 26) 2월 1만여 병력을 행주산성에 집결시켰다. 권율은 조방장(助防將) 조경(趙儆)을 시켜 행주산성을 수축하게 하고 목책을 만들게 하였으며, 병사(兵使) 선거이(宣居怡)는 금주(衿州:始興),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은 강화(江華), 충청감사 허욱(許頊)은 통진(通津:金浦)에서 각각 그를 지원하기로 하였다.
한편 일본군은 이 무렵 총퇴각을 감행하여 서울 부근으로 집결할 때였으므로 그 병력이 대단하였을 뿐만 아니라, 1월 말의 벽제관(碧蹄館)에서 승리한 직후여서 그들의 사기 또한 충천해 있었다. 2월 12일 새벽 일본군은 3만여 병력으로 내습, 여러 겹으로 성(城)을 포위하고 3진으로 나누어 9차례에 걸쳐 종일토록 맹공격해왔다. 이에 권율은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왜군과 맞서 치열한 싸움을 계속하였으며, 당시 행주산성의 싸움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마침내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는데, 권율은 이를 추격하여 130여 명의 목을 베었으며 적장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깃카와 히로이에[吉川廣家] 등에게도 부상을 입혔다. 행주산성의 전투는 임진왜란의 3대첩(三大捷) 중의 하나로, 권율은 이 공로로 도원수(都元帥)가 되었다. 당시 부녀자들이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날라서, 석전(石戰)으로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고, 때문에 ‘행주치마’라는 명칭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역사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수년전에 지인과 행주산성일대 카페에 커피한잔 하러 온적은 있었으나, 이렇게 가족들과 나들이 온것은 처음이다. 집에서 10km 남짓한 거리에 있는 곳이라 아주 가까운 곳인데도 이제서야 와보다니.. 차로 행주산성 주차장에 들어오는 입구도로가 여러 식당들을 지나쳐 오는데, 큰 주차장이 있어 주차하려다 보니 그곳이 맛집으로 유명한 국수집 주차장이었다. 헐~ 하면서 다시 차를 돌려 좁은길을 지나오니 행주산성 주차장이 나왔다.
들어가기 전에 일단 안내책자부터 챙긴다. 어딜가도 여행안내책자나 팜플렛이 여행 다닐때 꽤나 유용하기 때문에, 이제는 챙기는게 습관이 되었다.
대첩문을 들어서자 마자 보이는 것은 권율 장군 동상. 정확한 명칭은 "충장공 권율 도원수 동상". 1986년 세워졌다고 하며, 높이 4.5m, 기단이 3.5m 로 총 8m 높이.
연준이는 영어학원에서 쓰는 타블릿을 챙겨나와서 열심히 기록사진을 찍는다.
동상 뒤쪽에는 관군, 승병, 의병, 여성들의 항전모습을 새긴 부조가 있다.
민간인여성 들이 돌을 날라서 전투를 돕는 모습.
행주산성 안쪽길에 투호 체험장이 있어 잠시 투호를 즐겨본다.
투호장 옆으로는 행주산성과 관련된 사진 전시장이 있었다. 행주산성의 계절마다 다양한 모습이 멋지게 전시되어 있어서, 사진찍을때 참고로 할만 해 보인다.
지난 주말, 눈이 많이 내려서 행주산성 산책길 주위로 녹지않는 눈이 쌓여 있었다.
쌓인 눈을 보면 항상 연주와 연준이는 눈싸움이 벌인다.
특히 연준이는 행주산성 탐방하는 내내 계속 눈을 만지작 거리면서 노는게, 이 곳의 역사적 의미는 관심밖인듯 해 보였다.
행주산성의 토성. 총 길이는 약 1km 이며, 1992년 415m를 복원했다고 한다. 이 곳에서는 삼국시대의 기와 및 토기파편이 출토퇴는걸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군사적 요새지였음을 짐작할수 있다고 함.
토성길. 일본군이 바다 건너 한양까지 와서 여기를 기어올라 공격했다고 설명하니, 아이들은 "왜 하필 우리나라를 쳐들어왔어요 ? " 부터 시작해서 "왜 이렇게 힘들게 여기까지 와서 고생을 했대요 ?" 라고 물어본다. 그들은 왜 그랬을까 ? 그냥 편하게 자기네 땅에서 살지..
토성길에서 만나는 계단. 곳곳에 계단이 있어 쉽게 오르막을 오를수 있게 되어 있다.
토성길을 지나 정상에 올라서니, 고양시와 자유로가 보인다.
이 곳은 "충의정"으로 행주대첩과 권율장군에 대한 영상물을 상영하는 곳.
충의정을 지나면 만나게 되는 행주대첩비. 이 대첩비는 1970년 11월에 세워진 것으로, 고 박정희 대통령이 글을 썼다고 한다.
행주대첩비에서 바라본 덕양정과 방화대교.
1970년에 세워진 대첩비 아래에 대첩비각이 있는데, 첫번째로 세워진 행주대첩비가 사진에 보이는 대첩비각 안에 있는 것이다. 이 대첩비가 선조35년 1602년에 세워진 1호비이며 한석봉이 글씨를 썼다고 한다. (행주산성에 남아있는 가장 중요한 문화재)
대첩비 아래로 내려오다 보면 방화대교가 멋있게 내려다 보인다.
삼각대도 없이 볼록거울 이용해서 가족사진 찍기..
그리고 DSLR로 셀카 가족사진. 이렇게 많이 찍다보니 대충 느낌이 온다. 심지어 각도까지...
아이들도 이렇게 가족사진 찍는것을 재미있어 한다.
임진왜란때 옛 무기고와 군량창고가 있던 장소에, 1980년 건립한 대첩기념관이 있는데, 행주대첩 당시 사용했던 화차, 신기전등이 전시되어 있다. 복원된 화차 실물을 보면서 500년전 만들어서 사용했던 무기라 생각하니 정말 대단해 보였다. 전시관 실내에서는 촬영 금지.
충장사로 가는길.
이순신장군의 영정을 모셔놓은 현충사와 같이, 이 곳 역시 권율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1970년 행주산성 정상화 사업때 재건했다고 하는데, 제법 관리가 잘 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권율[權慄] - 네이버 지식백과
1537(중종 32)∼1599(선조 32). 조선 중기의 문신·명장.
본관 안동. 자 언신(彦愼). 호 만취당(晩翠堂) ·모악(暮嶽). 시호 충장(忠莊). 1582년(선조 1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고, 전적(典籍)을 거쳐 1587년 전라도도사, 이듬해 예조정랑 ·호조정랑 ·경성판관(鏡城判官)에 이어, 1591년 의주목사(義州牧使)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수도가 함락된 후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과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이 4만여 명의 군사를 모집할 때, 광주목사로서 곽영의 휘하에 들어가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북진하다가 용인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나 패하였다. 그 뒤 남원에 주둔하여 1,000여 명의 의용군을 모집, 금산군 이치(梨峙)싸움에서 왜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정예부대를 대파하고 전라도순찰사로 승진하였다.
또 북진 중에 수원의 독왕산성(禿旺山城)에 주둔하면서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여 지구전(持久戰)과 유격전(遊擊戰)을 전개하다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거느리는 대부대의 공격을 받았으나 이를 격퇴하였다. 1593년에는 병력을 나누어 부사령관 선거이(宣居怡)에게 시흥 금주산(衿州山)에 진을 치게 한 후 28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幸州山城)에 주둔하여, 3만 명의 대군으로 공격해온 고바야카와의 일본군을 맞아 2만 4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며 격퇴하였다. 그 전공으로 도원수에 올랐다가 도망병을 즉결처분한 죄로 해직되었으나, 한성부판윤으로 재기용되어 비변사당상(備邊司堂上)을 겸직하였고, 1596년 충청도순찰사에 이어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적군의 북상을 막기 위해 명나라 제독(提督)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에서 대진했으나, 명나라 사령관 양호(楊鎬)의 돌연한 퇴각령으로 철수하였다.
이어 순천예교(順天曳橋)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전쟁의 확대를 꺼리던 명나라 장수들의 비협조로 실패하였다. 임진왜란 7년 간 군대를 총지휘한 장군으로 바다의 이순신과 더불어 역사에 남을 전공을 세웠다. 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추봉되었으며, 충장사(忠莊祠)에 배향되었다.
충장사 앞에서 노부부의 부탁을 받고 사진촬영 해주는 중. 노년의 부부가 손잡고 나들이 나온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영정 앞에 서니, 절로 마음이 경건해지고 숙연해 지는게 향을 하나씩 올리고 감사의 묵념을 하게 된다. 문과로 관직에 오르신 분이 무장으로서, 임진왜란 당시 계속되는 패전으로 국운이 기울고 있을 무렵, 권율 장군이 지휘한 행주대첩의 승전보로 인해서 전세가 역전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하니, 후손으로서 훌륭하신 업적에 감사할 뿐이다.
집에서 가까운 훌륭한 유적지인데다가 산책하기에 너무나 좋아서 무심코 찾은 곳 치고 대박 이었던 행주산성, 아마 다음에 또 오게 될것 같다.
그리고 내려가는 길에 이 행주산성에서 지나쳐서는 안된다는 맛집을 찾아갔다. 줄을서서 들어가는 원조국수집인데, 인근에 유사 국수집들이 파리를 날리는 반면 이 곳은 여기저기서 찾아오는 손님들로 시끌벅적. 가게는 코딱지만한데 주차장이 행주산성 주차장만한 크기인것도 놀라웠다.
배가 너무 고팠던 나머지, 4명이서 5인분을 시키려고 했으나, 그냥 4인분하셔도 된다는 말에 딱 4인분만 시켰는데, 왠걸. 1인분이 내가 생각했던 1인분이 아니었다. 국수 한그릇에 4천원인데, 국수의 크기가 3인분은 족히 되어 보였다.
행주산성 돌아다니느라 배가 고파서 허겁지겁 먹기 시작하였으나 먹어도 먹어도 양이 줄지를 않는다. 연주엄마가 먹지 않고 장난치는 연준이에게 빨리 먹으라고 핀잔을 주니, "엄마가 한번 먹어봐요. 이게 안줄어 들어요~" 한다. 정말 그랬다.
다먹고 난 뒤 모습.. 2인분은 고스란히 남겼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4인가족이 2인~3인분을 시켜먹는데, 우리만 아무 생각없이 4인분 시켜서 먹었다. 난 그 많은 잔치국수를 반정도밖에 먹지 못했지만, 배가 너무 불러서 집에 돌아와서 한참동안 누워있어야 했다.
오전 반나절의 행주산성 탐방. 꽤나 알차고 유용한 나들이 코스였던것 같다.